AI STUDY/ISSUE

Claude Fable 5.1 암호 해독 총정리 — 370년 난제 44분 돌파, 그리고 "그 암호는 책에 없다"는 반박까지

또롬 2026. 9. 15. 16:27

    2026년 8월 31일, AI 벤치마크 회사 밸스AI(Vals AI)가 "Claude Fable 5.1이 370년 넘게 풀리지 않은 암호를 풀었다"는 글을 올렸다. 9월 중순인 지금까지도 해커뉴스와 각국 IT 매체, 국내 커뮤니티에서 이 이야기가 돌고 있다. 나는 AI를 실제 조사·분석 업무에 붙여 쓰는 입장에서 이 사례를 읽었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숫자는 "44분"이 아니라 그 다음 날 올라온 반박 리포트라고 봤다. 사건의 순서와 근거를 차례대로 정리했다.


    1. 사건 요약 — 무엇을 풀었다고 했나

    항목 내용
    발표 주체 밸스AI(Vals AI), 작성자 게비 자프(Geby Jaff)
    발표일 2026년 8월 31일
    사용 모델 Claude Fable 5.1
    대상 암호 Cyphral Distich(사이프럴 디스티크)
    소요 44분, 토큰 약 17만 6천 개, 사람의 개입 0회
    추가 성과 같은 방식으로 285개 숫자짜리 Cyphral Octastich도 해독 주장

    Cyphral Distich는 스코틀랜드 작가 토머스 어쿼트 경(Sir Thomas Urquhart)의 1653년 저작 『로고판덱테이션(Logopandecteision)』 말미에 실렸다고 알려진 암호문이다. 32개씩 두 줄, 총 64개의 숫자로만 이루어져 있다. 첫 줄은 5.3.27.38.32.14.21.8… 식으로 점으로 구분된 숫자가 이어지는 형태다.

    어쿼트는 아마추어 퍼즐꾼이 아니다. 라블레를 영어로 옮긴 번역자이자, 끝내 완성하지 못한 인공 보편언어를 설계한 인물이다. 자기 글 속에 수수께끼를 심어 두는 게 일종의 서명이었다.

    이 암호는 1899년 학술지 『노츠 앤 퀴어리스(Notes and Queries)』에 공개 미해결 문제로 제기됐고, 20세기 암호학 문헌에 다시 등장했다. 역사 암호 연구자 클라우스 슈메(Klaus Schmeh)가 만든 "가장 유명한 미해결 암호문 50선"에서 28위에 올라 있다. 참고로 같은 목록에는 CIA 조형물 크립토스(Kryptos)의 K4가 들어 있다.


    2. 핵심 아이디어 — 열쇠는 '외부 암호표'가 아니라 '책 그 자체'였다

    지난 100여 년간 시도된 방법은 빈도 분석, 단순 치환, 동음 치환이었다. 전부 실패했다. 밸스AI의 설명에 따르면 실패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들이 전부 "책 밖에 있는 암호표"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Fable 5.1이 잡아낸 단서는 두 개다.

    첫째, 이 암호문이 어쿼트의 32개 프로퀴리테이션(Proquiritations) 바로 뒤에 인쇄돼 있다는 점. 어쿼트 본인이 32라는 숫자를 굳이 강조한다. "서른둘 같은 수는 달리 고를 것이 없다"는 취지의 문장이 본문에 있다.

     

    둘째, 암호에 딸린 시가 정직한 독자에게 "자기 마음의 소망과 저자의 뜻"을 찾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다는 점. 그리고 32개의 프로퀴리테이션 각각은 "~이 바람이다", "~을 희망한다"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32개 항목, 한 줄에 32개 숫자, 두 줄, 그리고 '소망'. 여기서 규칙이 하나로 수렴한다.

     

    암호 한 줄의 i번째 숫자를 보고, i번째 프로퀴리테이션으로 간 다음, 그 숫자를 단어 순번으로 삼아 해당 단어의 첫 글자를 취한다.

     

     

    이 규칙으로 나온 평문은 다음과 같다.

     

    O GOD UPHOLD KING CHARLS THE SECOND AND MAKE HIM THE SUPREME RULER OF THIS LAND

     

     

    "오 신이시여 찰스 2세를 보우하사 그를 이 땅의 최고 통치자로 삼으소서" 정도의 뜻이다. 나는 이 결과의 진짜 강점이 내용이 아니라 자기검증 구조에 있다고 봤다. 두 줄이 각각 정확히 32글자로 떨어지고, and / land로 각운이 맞고, 원문이 약속한 '디스티크(2행시)'라는 형식과 일치하며, 열성 왕당파였던 어쿼트의 정치적 입장과도 맞는다. 역사 암호 연구에서 이렇게 값싸게 검증이 붙는 경우는 드물다.


    3. 두 번째 암호 — 285개 숫자의 Octastich

    어쿼트는 같은 방식의 더 큰 암호문을 하나 더 남겼다. 1652년 저작 『더 주얼(The Jewel)』의 Cyphral Octastich로, 숫자가 64개가 아니라 285개다. Fable 5.1은 여기에도 같은 아이디어를 적용했다. 다만 인덱스 대상이 '문단'에서 '페이지'로 바뀐다. 『더 주얼』의 번호 매겨진 페이지가 정확히 284쪽이고, 8행시와 데카그램을 합친 숫자가 285개라는 점을 근거로, k번째 숫자를 k쪽의 단어 순번으로 읽는 방식이다.

     

    결과는 ABABABCC 운율의 옥타바 리마 형식 왕당파 기도문이었다. 1652년 3월 런던에서 쓴 것으로 서명돼 있고, "GREAT LORD, MANTAINE THAT REGAL FAMILIE / WHEREOF KING CHARLS THE SECOND IS THE HEAD"로 시작해 "AMEN, SO BE IT"으로 끝난다.

     

    다만 이건 완전 해독이 아니다. 밸스AI 스스로 한계를 명시했다.

    미해결 지점 내용
    4행 I-R-S-H로 나옴. IRISH의 오기이거나 의도적 축약(그래야 정확히 10음절)
    5행 4~12번째 글자 C-O-N-E-R-T-H-T-O로 나오며 읽히지 않음. 9개 중 8개가 정확한 첫 출현 일치라 텍스트 자체는 그렇게 나온다
    159번 위치 이후 모든 숫자가 k−1쪽에 걸림. 한 페이지가 두 번 쓰였거나 인쇄상 중복 가능성
    검증 한계 1652년 『더 주얼』의 무료 페이지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음. ±1 위치 확정에는 실물 또는 1983년판이 필요

    읽을 수 있는 275개 위치 중 231개가 EEBO-TCP 전사본에서 '해당 글자로 시작하는 첫 단어'와 정확히 일치했고, 나머지 44개는 1~3단어 어긋난다. 어긋난 이유도 식별 가능하다고 했다. 페이지 상단의 하이픈 분철, 합성어, '&' 기호, 문단 번호, 전사되지 않은 그리스어 구절 등이다.


    4. 모델을 어떻게 몰았나 — 프롬프트보다 '제약 설계'

    이 글에서 실무적으로 가장 참고할 만한 부분은 해독 자체가 아니라 작업 설계 방식이다. 밸스AI 연구자는 몇 달에 걸쳐 여러 프런티어 모델에 같은 시도를 했고, 검증 가능한 해답을 낸 건 Fable 5.1뿐이었다고 밝혔다.

    지시는 단순했다. 미해결 암호를 하나 골라 풀라는 목표, 그리고 두 개의 제약이다.

    • 이미 답이 있거나, 그럴듯한 답이 여러 개 나올 수 있는 암호는 피할 것. 검증 불가능한 문제를 붙잡으면 결과를 판정할 수 없다.
    • 수천 명 혹은 CIA급 조직이 이미 막대한 시간을 쏟아부은 문제는 피할 것. 크립토스 K4가 대표적으로 제외됐다.

     

    모델은 후보 문제들을 훑어보고, 안 풀리는 문제는 중단하고, 유독 해볼 만해 보이는 문제 하나를 골랐다. 연구자 본인도 "다른 모델이라면 못 풀었을 것이라 보지는 않는다. 단서 자체는 아주 단순하다. Fable이 잘한 건 이 문제가 유난히 만만하다는 걸 알아챈 판단"이라고 썼다.

     

    나는 이 문장이 리포트 전체의 결론이라고 봤다. 팔린 건 암호 해독 능력이 아니라 '싸게 검증되는 문제를 고르는 판단력'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는 지속성'이다. 보안 전문가 브루스 슈나이어도 자기 블로그에서 이 사례를 두고, 많은 탐색과 테스트가 필요한 종류의 일에 모델이 강하다는 기존 관찰과 일치한다고 짧게 평했다.


    5. 반박 — "그 암호는 1653년 책에 아예 없다"

    여기서부터가 기사들이 잘 안 다루는 두 번째 장이다. 발표 바로 다음 날인 2026년 9월 1일, 레티큘리(Reticuli)라는 그룹이 독립 재현 시도 결과를 공개 저장소에 올렸다. 제목부터 직설적이다. "Fable 5.1이 Cyphral Distich를 풀었다는 주장은 1653년 책과 대조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지적은 세 갈래다.

    첫째, 1653년 책은 암호문 없이 끝난다. 영국국립도서관 마이크로필름 기반 스캔본을 확인하면 프로퀴리테이션 30~32번 다음에 인쇄 장식, "Parva peto" 명구, FINIS, 정오표 순으로 이어지고 숫자 암호문은 어디에도 없다. 필름 전체 OCR에도 점으로 이어진 숫자열이 나오지 않는다. 결손 없는 EEBO-TCP 전사본(A64608)도 같은 구성이다.

     

    둘째, 제시된 방법으로는 제시된 평문이 나올 수 없다. 32개 프로퀴리테이션 실제 본문에서 10개 위치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필요한 글자로 시작하는 단어가 해당 구간에 아예 없기 때문에, 단어 순번을 어떤 방식으로 세든 그 글자를 만들 수 없다. 예를 들어 KING의 K가 나와야 하는 11번 프로퀴리테이션은 단어가 80개인데 K로 시작하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레티큘리는 토큰화 방식, 구간 매핑, 인덱스 기준, 첫 글자/끝 글자, 글자 위치를 조합한 65가지 규칙을 전부 돌렸고 최대 일치가 64개 중 8개, 즉 우연 수준이었다고 보고했다.

     

    셋째, 출처 자체가 책 안에 있다는 주장과 충돌한다. 어쿼트의 두 암호문은 1899년에 나온 전기를 통해 전해진 것으로, 원출처가 확립돼 있지 않다는 게 클라우스 슈메가 2019년에 이미 정리한 내용이다. 디스티크도, 옥타스티크도, 데카그램도, 딸린 시들도 『로고판덱테이션』(A64608)이나 『더 주얼』(A95749)의 전사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반박 리포트도 밸스AI 글의 여러 부분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숫자 배열은 기존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고, 어쿼트의 "서른둘" 인용은 진짜이며, 1652년 『더 주얼』이 정확히 284쪽이라는 전제도 참이다. 결론은 "암호는 실재하지만, 1차 기록 기준으로 여전히 미해결"이다.

    판정을 뒤집을 조건도 명시돼 있다. 디스티크가 프로퀴리테이션 뒤에 실제로 인쇄된 판본, 그리고 문제의 10개 머리글자를 포함하는 프로퀴리테이션 본문이 공개되면 된다. 밸스AI 글은 내부 파일(전사본, 해답 문서)을 언급하지만 공개하지 않았다.


    6. 그래서 이 사건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나는 이 건을 "AI가 암호를 풀었다"가 아니라 "AI가 낸 결과를 검증하는 비용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 사례"로 읽었다. 실무 관점에서 남는 교훈은 세 가지다.

     

    첫째, 모델은 그럴듯한 평문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평문은 각운, 글자 수, 역사적 정합성까지 갖출 수 있다. 자기검증처럼 보이는 신호가 여러 개 겹친다고 해서 그게 1차 사료 확인을 대체하지는 않는다.

     

    둘째, 이 사건의 병목은 지능이 아니라 원자료 접근이었다. 1652년 책의 페이지 이미지가 인터넷에 없다는 사실 하나가 양쪽 모두를 붙잡았다. 해독 측은 9개 글자를 확정하지 못했고, 반박 측도 "판본이 나오면 판정이 바뀔 수 있다"고 열어 뒀다.

     

    셋째, 그럼에도 밸스AI의 작업 설계 자체는 그대로 쓸 만하다. 명확한 목표 하나, 검증이 싼 대상을 고르라는 제약, 이미 과열된 문제를 피하라는 제약, 중간 개입 없음, 그리고 실패한 시도까지 남긴 기록. 장시간 에이전트 연구 작업을 설계한다면 이 뼈대는 그대로 가져갈 만하다. 다만 예산은 해답을 찾는 쪽이 아니라 검증하는 쪽에 잡아야 한다.


    정리

    • 2026년 8월 31일 밸스AI는 Claude Fable 5.1이 44분, 약 17만 6천 토큰, 사람 개입 0회로 17세기 암호 Cyphral Distich를 풀었다고 발표했다.
    • 제시된 해법은 외부 암호표가 아니라 책 자체를 열쇠로 쓰는 방식이며, 평문은 찰스 2세를 위한 왕당파 기도문 2행시다.
    • 같은 방식으로 『더 주얼』(1652)의 285개 숫자 암호도 해독했다고 했으나 9개 글자는 미확정 상태다.
    • 2026년 9월 1일 레티큘리가 반박을 공개했다. 1653년 책에는 해당 암호문이 인쇄돼 있지 않고, 제시된 규칙으로는 10개 위치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며, 65개 규칙 조합의 최대 일치는 우연 수준이라는 내용이다.
    • 두 암호문의 숫자 배열과 어쿼트의 "서른둘" 인용, 『더 주얼』 284쪽이라는 전제는 반박 측도 사실로 인정했다.
    • 현재 1차 기록 기준으로 이 암호는 여전히 미해결로 분류된다. 판정을 바꾸려면 디스티크가 실제로 인쇄된 판본과 문제의 머리글자를 담은 본문이 공개돼야 한다.